[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3 /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 본문 :요한계시록 2:1-29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2년 12월 2일 주일

2:1-29, 삼상 3:1-14 / 나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


19941021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는 분 계신가요? 이 날은 우리나라 건설사에 치욕스러운 날로 한강을 연결하는 교각 중 성수대교가 붕괴한 날입니다. 이 사고로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특히 대다수의 피해자들이 등굣길에 있었던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침에 등교하면서 사고를 당할 것을 예견하지 못했고 아마 버스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거나 잠을 자거나 우두커니 창밖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순식간에 봉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성수대교 붕괴는 예견된 참사였다는 것입니다. 성수대교는 트러스트라는 방식으로 지어진 다리로 이음새가 잘못되면 무너지기 쉬운 방식으로 지속적인 점검이 필요한 다리였지만 안전점검이 소홀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시공업체가 무리하게 다리 이음새 작업을 하면서 볼트 삽입을 무리하게 진행하여 구멍의 모양이 변형되어 볼트의 강도가 약해졌다고 합니다. 또한 성수대교는 본래 하중 32톤 이상이 되는 차량을 진입시키면 안되는 다리입니다. 하지만 이를 초과하는 과적차량들이 끊임없이 왕래하여 40톤이 넘는 차량들의 압력을 받아서 붕괴는 예견되었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경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수대교를 건설할 때 공법에 대한 반론이 있었고 또한 지속적인 점검에 대한 요청이 있었고 그리고 과적금지에 대한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경고를 무시한 당사자들로 인해 등굣길에 있던 무고한 학생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참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많은 경고를 듣고 삽니다. 저희 집에서도 경고는 난무합니다. 주영이와 주은이 사이에, 주영이와 주찬이 사이에, 그리고 주은이와 주찬이 사이에 경고를 서로 주고받습니다. “너 그렇게 하면 혼난다.” “너 그렇게 하면 안 놀아준다등등 그런데 이러한 경고는 들으면 좋기는 하지만 듣지 않았다고 해서 그리 큰 문제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생명의 문제가 달려있는 경고에는 즉각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반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경고는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참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편지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말씀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사도요한이 간곡하게 아시아에 있는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권면이 아니라 절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한다는 간절함이 이 편지를 읽는 모든 교회들을 향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이 어떻길래 이 말씀을 들어야만 할까요? 그리고 이 이야기는 비단 아시아에 있는 교회의 성도만 들어야 하는 내용일까요? 이런 물음에 대해서 오늘의 본문은 단호하게 답변합니다. “이 말씀을 들어야 산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라고 강변하십니다.

물론 수신자가 명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성경에서는 귀 있는 자는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면 이 편지의 수신자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뿐만이 아니라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임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삶을 사시는 동안 그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주예수님의 양이고,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면 예수님의 양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우리의 귀를 예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음성에 대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이 동시에 언급이 되는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일화의 내용을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엘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해서 사무엘도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세 번씩이나 엘리 대제사장에게 가서 부르셨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사무엘도 그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바로 알지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가 있을까요?

 

1. 첫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사무엘 되게 된 결적적인 계기는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건입니다. 어느 날 밤 성전에서 자는데, ‘사무엘아! 사무엘아!’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이 부르나 보다 하고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3번을 했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나 보다 생각하였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무엘에게 이제 다시 부르는 소리가 있거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사무엘은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사무엘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믿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한 가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은 그 말씀을 우리 삶에 적용해주십니다. 또 다른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이해하고 위로하려고 애쓰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보살핀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를 인도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방법은 성령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통해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실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직접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씀하셨던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사실 구약 전체를 볼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했던지, 아니면 아예 무시해 버리든지 했습니다. 이 형태는 신약에 와서도 계속됩니다. 유한한 인간과 무한한 하나님이 서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분명 초자연적인 일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의 삶에는 초자연적인 차원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가장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시는데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는 처음부터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꾸 길들여져야 합니다. 성령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에 대해서도 민감함을 계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일상적인 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온유한 음성을 의식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바로 갈 5:16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대로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우리의 지성과 마음을 연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볼 것입니다.

 

2. 둘째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직접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이래라 저래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는 직관하고 비슷합니다. 신앙생활을 좀하다보면 누군가를 꼭 찾아가봐야 할 것 같아서, 찾아가 보면 내가 찾아가봐야 될 이유를 알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다 보면 성경에 분명히 있는 것도 있고 그런 경우는 그대로 하면 되고, 소위 마음에 평안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분명한 것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도적절하지 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생활 가운데는 그렇지 않는 것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께 그것을 놓고 기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있어서 명심할 것은 처음에는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들의 분별과 도움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꾸준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훈련, 영적 분별 훈련, 실제 생활에서의 실천 등에 힘쓰면, 얼마가지 않아서 !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구나!’ ‘! 이것은 하나님께서 근심하시는구나!’하고, 순간순간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는 순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세상을 향한 귀, 사탄을 향한 귀가 너무 예민하게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유혹, 죄짓는 일, 분노, 질투, 게으름 등의 충동을 받습니다. 하와에게 사탄이 찾아갔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보다는 마귀의 음성을 더 크게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잠잠히 있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매일 분주하게 말씀을 전하시고 가르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고요히 혼자 있는 시간도 무척 중요했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을 쏟아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열심히 듣기도 하셨습니다.

성경은 시간을 내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들려주셔야 할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고 중심을 모아 하나님 앞에 잠잠히 있는 법을 배울 때.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지만, 성령님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에는 현상적으로 임하는 것 같이 보이기 때문에 임한다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하시면신기한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치유가 일어나기도 하고, 술이나 담배가 끊어지고, 강한 믿음의 확신을 갖기도 하고, 방언기도를 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십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의 지식과 이성이나 경험으로 제한하면 안 됩니다. 그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3. 셋째로, 늘 임재해 계시는 성령님을 말씀으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는 여호와의 전 법궤 앞에서 자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늘 성전 안에 사는 생활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늘 교회 안에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자기 몸이 성전입니다. 성령이 언제나 우리 몸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늘 의식하고 주목하고 귀를 기울이며 살 때, 하나님의 음성은 놀랍게 들기 시작합니다.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정상일 뿐만 아니라 필수적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도들을 향해 성령을 힘입어서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성령과 더불어 살라고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고요한 시간을 마련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고 순종하기로 결단하셔서 풍요롭고 신나고 재미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첫째, 첫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음랑하고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거짓을 쫓을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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