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2 / 예수님을 믿는 참된 의미
- 글쓴이 헝가리선교사 날짜 2013.01.18 09:45 조회 2,968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은 1905년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십대부터 철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에 흥미를 느끼고 프로이드와 교신을 하며 공부했는데 2차 대전 때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죽음의 수용소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됩니다. 3년간의 수용소 생활동안 그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음식과 약이 없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삶의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관찰하고 전쟁이후 자신의 관찰을 바탕으로 극한상황에 갇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기술한 ?심리학자의 죽음의 수용소 경험?이라는 독일어로 쓴 책을 1946년에 출판합니다. 그리고 1959년 Man's Search for Meaning 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번역본이 나옵니다. 이 책은 24개 국어로 번역되어 1,200만부 이상이 팔렸으며 미국 국회의 ‘이 달의 책’ 클럽이 “당신의 삶을 변화시킨 책”을 묻는 설문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열 권중 하나로 선정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프랭클은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묻습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죽음의 문턱에서 함께 서 있었던 사람들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삶의 의미는 살아있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너무나 당연한 그러나 강력한 설득력을 가진 대답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모든 것은 우리에게 의미를 갖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의미를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너무나도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언제나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그 죽음은 어느덧 우리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며 나아가 무의미를 안겨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희망과 삶의 목적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과 삶의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프랭클은 이야기 합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신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생각하며 깊이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희망과 삶의 목적을 함께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절망이 아닌 천국의 소망을 붙잡고 삽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얻은 구원의 은혜를 많은 사람들에게 나눠야 한다는 삶의 목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주어지면, 물질이 주어지면, 건강이 주어지면, 성공하면, 이라는 조건을 전도라는 말 앞에 붙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통해서 얻은 희망과 삶의 목적이 우리에게 분명하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인하여 전도하는 일에 힘을 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요한은 성령의 충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는 ‘머리로 믿는 교회’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가슴으로 믿는 교회’가 있습니다. 저는 우리 선교교회가 가슴으로 믿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령을 충만히 받아서 가슴이 불같이 뜨거운 성도님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불같이 뜨거운 체험을 통해서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머리로만 믿는 사람은 행동하지 않습니다. 머리로 믿는 사람은 신앙의 역동성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머리로 믿는 사람은 신앙이 생활로 나타나지 않고 그저 지식으로만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믿는 것을 신앙생활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봉사하고 헌금하는 일련의 일을 신앙생활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맞는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종교생활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과 종교활동을 혼동하며 삽니다. 종교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자위하며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들 가운데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종교활동이 아닌 신앙생활을 요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믿는 것을 삶에 행하며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격하며 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 중에 하나인 시간을 드려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전에 슬램덩크라는 만화가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가 있었는데 저도 그 만화책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완간 된 것이 아니라 몇 주에 한권씩 출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다가 서점에 가서 책을 사서 그날에 다 읽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아서 그 말씀을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성경을 읽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로서의 성경읽기입니다. 또한 기도하면 응답된다는 믿음으로 기도했더니 응답되었던 놀라운 경험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오히려 내 삶이 손해라는 생각에, 그리고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갈증으로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과 대화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로서의 기도생활입니다. 헌금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우리의 아름다운 향기라고 생각하며 믿음의 분량대로 힘써 드리는 것은 신앙생활로서의 헌금이지만 그런 믿음이 없이 의무적으로 드리는 것은 종교활동으로서의 헌금에 지나지 않고 이런 헌금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안드리면 어떠냐고? 신 16: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신앙의 활동이 생활로 우리의 삶에 나타나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님으로 날마다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날마나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생활할 수 있게 되어질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성령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편지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아니라 12절부터 기록한 말씀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갑니다. 오히려 요한은 계속해서 이 편지를 기록하라 말씀하신 분이 누구신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요한이 기록한 편지는 요한이 자의적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장차 오실 예수님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수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편지를 수신하는 일곱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간단명료하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라고 하지 않고 세세하게 그리고 성스럽게 자신에게 명령하신 분이 누구신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고 반드시 지켜야 된다는 무게감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조폭 출신의 회개한 초신자가 죽어서 천국엘 갔습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예수님이 인자한 얼굴로 웃으시면서 다가오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뵈니까, 너무나 감격스럽고 흥분이 된 나머지, 그만 ‘예수님’의 이름이 생각이 나질 않는 겁니다. 그래서 엉겁결에 예수님께 악수를 건네며 한 마디 했습니다. “아따, 성님, 반갑습니더” 여러분, 아무리 당황해도 예수님의 이름을 까먹는 일은 없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모습으로 요한에게 비추어졌나요. “예수님은 인자 같은 모습으로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머리와 털이 흰 양털 같고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달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으며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날선 검이 나고오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좀 더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하나하나 풀어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3절에 나온 말씀에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촛대 사이라고 했으니까 여기는 성소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다는 것은 제사장들이 입는 옷입니다. 이것은 즉 예수님께서 우리의 제사장, 혹은 대제사장이 되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에 금띠를 뗬다는 것은 '왕'을 상징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금띠를 띠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에 금띠를 띠었습니다.
14절 말씀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희다는 것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의로운 분이십니다. 그리고 눈은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불을 켜면 환해지지 않습니까? 감춘 것이 불 가운데 다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다 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감추거나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15절 말씀에 "그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예수님의 발은 풀무 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다고 했습니다. 주석은 놋입니다. 놋을 풀무불에 단련하면 뻘겋게 달아오릅니다. 여기서 놋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장차 예수님의 발은 만국을 발아래 밟고 죄지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 같다고 했습니다. 나이아가라 같이 엄청나게 큰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 같다는 것입니다. 이 소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소리입니다.
본문 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온 몸의 힘이 빠져서 죽은 자같이 된다고 합니다. 저는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경험하신 분들이 공통적으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요한도 그런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오른손을 요한에게 얹고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처음이요 마지막이십니다.
본문 18절을 보겠습니다.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이 말씀이 얼마나 대단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전에는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죽었었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셨을 때 육체의 몸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혼까지도 음부까지 내려 가셨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영원토록 살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다음 본문 19절입니다. 이 말씀이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지금 여기 보면 요한이 기록해야 할 세 가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로는 네가 본 것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둘째로는 지금 있는 일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셋째로는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본문 20절을 보겠습니다.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 보면 먼저 요한이 본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일곱 금 촛대 사이에서 일곱 별을 오른손에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별은 “주의 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일곱 촛대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입니다. 일곱 교회, 즉 2,000년 교회사에 나타나는 현재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차 될 일은 앞으로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 되어질 일들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크게 이렇게 셋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요한복음 2장부터 5장까지 공부할 것은 현재의 일을 공부할 것입니다. 현재의 초대교회부터 지금의 마지막 교회까지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공부하고 난 후 하늘의 문이 열리고 요한이 하늘로 불려 올라가는 것은 장차 될 일을 보여주시고 기록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책을 쓰는 작가로서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람이 있다면 바로 공지영이라는 작가일 것입니다. 책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나아가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는 일에 전념하는 그녀가 그의 책 ?괜찮다, 다 괜찮다?라는 책에서 “인생이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진보하거나 추락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것 같더라구요. 앞으로 나아가거나 추락하거나. 제자리에 머무는 것도 힘든 것 같아요. 내 힘으로 안 되는 일이 참 많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참 편안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라고 이야기 합니다.
무수한 가치관과 논리들이 종횡무진 하는 현대세계 안에서 말씀의 가치를 붙들고 산다는 것은 선명한 역사의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기본적으로 종말론적 비전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때가 가까웠음을 보고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고 삶에 있어서 부수적인 일들에 붙들려 산다면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과 똑같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