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1 /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 본문 :요한계시록 1:4-6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2년 11월 11일 주일

1:4-6 /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누군가로부터 편지를 받아보신 적 얼마나 되셨습니까? 요즘은 대부분 이메일로 모든 편지가 옵니다. 아니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서 서로의 소식들을 전달하고 또 전달받습니다. 설령 이메일을 통해서 편지가 왔다고 알림이 와서 막상 확인해보면 쿠폰할인, 보험가입, 전화요금 늦게 내지 말라는 고지서 등이 이메일을 통해서 옵니다. 그런데 손으로 써서 보낸 편지를 직접 받았을 때의 느낌,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라면 그 느낌은 과연 어떨까요?

조심스럽게 편지봉투를 개봉하고 정성스럽게 접혀 있는 편지를 봉투에서 꺼내서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를 펼쳐봅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사랑하는 누구에게와 비슷한 내용의 인사말로 편지가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안부를 전하고 안부를 묻는 내용과 더불어서 편지를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 기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의 본문도 예수님의 제자인 요한이 그가 사랑하는 교회의 성도님들을 향해서 보낸 사랑의 편지입니다. 더 엄밀히 이야기 하면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께서 그 각 지체 된 성도들을 향해서 보낸 사랑의 편지인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한 성도들을 향해서 보낸 사랑의 편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되는 이유는 이러한 생각을 갖지 않고 다음부터 나오는 내용을 보면 사랑해서 기록한 편지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편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편지를 읽는 것과 그렇기 않고 성경을 읽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어려서 부모님의 훈계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성장하여 자녀를 둔 상황에서 그것이 무척이나 감사한 일이었음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물론 훈계를 받는 당시에도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품었기는 하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훈계해 주신 어머님께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길 가던 사람이 저를 부르더니 다짜고짜로 주먹을 휘둘렀다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 반격을 했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은 당신의 피 값을 주고 세운 교회를 그리고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자신의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고 계십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요한은...”이라는 말로 편지가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편지의 기록자가 요한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줍니다.

요한은 누구입니까? 레오날도 다빈치는 그림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의 옆에 앉아 소녀처럼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흰 손을 겹치고 있는 요한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영어 John은 헬라어 요안네스, 히브리어 요하난에서 유래되었는데,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세대배의 아들 요한과 그 형제 야고보를 보아너게우뢰의 아들이라 부르셨습니다. 9:54에 주님에게 겸손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에게 불을 내리기를 원했을 때 나타납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했듯이 앞으로 예수님이 왕이 되실 그 때에 예수님의 보좌 좌편과 우편자리를 달라고 예수께 간청하는 절제 없는 야망을 갖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도 가운데서 오직 요한만이 십자가 옆에 서서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적들이 악의에 찬 독설을 내뿜을 때에도 요한은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을 들은 제자도 유일하게 요한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바라보시면서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고 하시고 요한에게 그 어머니를 가리키며 보라, 네 어머니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요한만이 내가 목이 마르다다 이루었다는 최후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께서 고개를 떨구시고 영혼이 떠나가시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를 때 피와 물이 나온 것과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사한 사실을 말한 것도 요한뿐이었습니다.

이런 사도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순교하지 않고 밧모섬이란 곳에 유배를 가게 됩니다. 지중해 연안 소아시아 지역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약 90Km쯤 떨어진 밧모섬은 당시 로마에서 정치범이나 적군의 포로들을 가두어 놓았던 몹시 거칠고 황량했던 유배지였다고 합니다. 밧모섬에 유배된 사람들은 광산에서 힘든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증거 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사도의 길을 걷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어 고난을 받음으로 예수의 환란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였던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요한의 나이 백세가 거의 되었을 때 도미시안 황제의 핍박을 받아 뜨겁게 끓인 기름 가마에 들어가는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로 살아남아 종신형을 선고받고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죽을 때까지 이러한 고난에 굴하지 않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도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모든 고난을 감당하면서 까지도 증거 하려고 했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 하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본문 4절에 보면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한다...”고 했습니다. 유배 생활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거의 100세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삶이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노구의 몸을 이끌고 또한 중노동에 가까운 상황에 처해있음에도 그는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편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강력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은 바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도들과는 달리 오직 사도요한만이 예수님의 최후를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와 영원히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우리가 있기 전에도 계셨고 우리와 함께 계셨고 그리고 다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열심때문에 행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 받는 인생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가난한자, 눈먼 자, 갇힌 자,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고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는 말씀처럼 천국의 백성이 되는 권세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요 14:1에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처소가 준비되어지면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교회를 위해 그리고 믿는 우리를 위해서 너무나도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을 가르켜 잔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위를 위해 준비하시고 베푸시는 잔치의 날인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이유로 인해서 당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쉽게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원리대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의 다시 오심은 너무도 기쁜 소식이며 그 날은 이 땅에서 신실하게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에게 복된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다닐 때 숙제를 잘 안했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기억으로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할 때 단골로 혼이 났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날은 숙제를 열심히 해서 가면 숙제검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숙제를 안해갈 때는 빠짐없이 숙제 검사를 하시던 선생님이 제가 숙제를 해갈 때는 숙제검사를 하지 않는 날도 있으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서운한지 몰랐습니다. 물론 숙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제가 숙제를 해갈 때는 숙제검사를 하지 않는게 그렇게 좋지 않았다는 기억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복음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이 땅에 반드시 다시 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루 하루 인생을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님들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한은 일곱 교회에 인사하면서 하나님과 그 앞에 있는 일곱 영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일곱 영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어떤 이들은 일곱 천사들일 것이라는 주장합니다. 9:26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라고 말하고 있고, 5: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 절의 일곱 영은 성령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이 일곱 교회를 위해 기원하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언급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일곱 영으로 표현한 경우가 특별하기는 하지만 성령을 하나가 아닌 일곱으로 표현한 경우가 성경에 더러 있습니다.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라고 하여 성령을 일곱 측면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슥 3:9. 4:10에서는 일곱 개의 눈이 성령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또 다른 보혜사이십니다. 보혜사라는 의미는 우리를 도우시는 분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변호해 주시고 중재해 주시고 협조해 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며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의 모습이 바로 성령님의 동행인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님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 언제나 함께 하셔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늘 성령님과 동역하고 성령님과 함께 할 때 성령님은 믿는 사람들의 삶에서 때로는 능력으로, 때로는 위로로, 때로는 지혜로 역사하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십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 부활도 우리를 사랑하심의 표현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죽으면 부활이 과연 있을까요? 이러한 의문은 초대교회에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삶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고전 15:32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그래서 사도바울은 만일 자신의 바라는 것이 이 세상뿐이라면 모든 사람 가운데서 자신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삶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열매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곧 소망 없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이 담겨진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들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임을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이 모든 일들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길 원하셨던 것은 바로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에 은혜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가득한 삶을 살아아고 있습니까?

그러한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계신다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원리가 다음 절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갈 때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이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절망해 있는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사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롭고 곤고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지혜를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 주심에 늘 감사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이며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스타프 도오르라는 유명한 화가가 주님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서 어떻게 주님의 초상화를 그릴까라고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에 그를 사랑했던, 예수를 잘 믿는 믿음의 친구가 그에게 찾아와서 이런 유명한 충고를 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여, 자네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나, 그러면 자네는 주님의 형상에 더욱 가까운 주님의 모습을 그릴 수가 있을 것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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