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26/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글쓴이 헝가리선교사 날짜 2013.08.07 11:46 조회 1,887
이제 드디어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을 대하게 됩니다. 2012년 11월에 시작된 요한계시록 강해가 대략 9개월의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엄밀하게 요한계시록을 세세하게 살펴보지 않고 각 장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마지막 시대를 살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사람들에게 하시고자 하는 음성을 전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계시록은 믿는 우리에게는 소망의 책이며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기회의 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나 세상에 있는 사람이나 요한계시록이 전하는 공통적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철저히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진 책입니다.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환한 웃음과 함께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는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전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열린 책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책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복음에 굳게 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기다려지는 것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방학을 기다리고, 직장인은 월급날을 기다리고, 군인들은 제대를 기다립니다. 반대로 기다려지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학생들은 시험 혹은 성적표 받는 날이 기다려지지 않고, 직장인들은 인사발표가 있는 날이 기다려지지 않고 그리고 군인들은 유격훈련 혹은 혹한기 훈련 등이 기다려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기다려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의 결국이 완성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룩한 신부로 세상에서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신랑이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우리에게는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야만 혼인잔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2장 20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겠다고 증언하는 이에게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천국의 외형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면 22장은 천국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것은 바로 전장에 이어서 무엇인가를 더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천국에서의 아름다운 생활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삶의 중심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1절에 보면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이 앉은 보좌는 요한계시록 21장에 언급된 새예루살렘 성전과 연계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새예루살렘에는 성소가 필요 없다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이제는 더 이상 희미하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성소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과 어린양이 항상 보좌에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생명수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생명수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이며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는 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인생, 고독하고 절망스러운 인생에게 생명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생명수가 흘러가는 곳에 생명나무가 있다고 2절은 말씀하십니다. 창세기 2장 9절에 생명나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와 함께 등장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있습니다. 하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고 난 다음에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고 그 후에 생명나무가 중요한 나무로 부각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생명나무를 지키셨는데 그 이유를 창세기 3장 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생명의 근원되신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통해서 영생할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함으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영적인 죽음과 육체적으로 사망이 왕 노릇하는 죽음의 법에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명나무는 아무도 접근할 수 없도록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봉쇄가 되었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가 영생할 수 있는 방법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영생의 축복을 얻게 되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 14절 말씀을 보면 큰 환란에서 나오는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들이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은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2장 14절 말씀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 우리의 두루마기를 빨 수 있고 또한 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실하게 이 놀라운 복음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삶을 통해서 이루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읽고 들은 이상 이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실로 내가 속히 오리라는 말씀보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더 위로가 되는 말씀이 있겠습니까? 주님은 반드시 속히 진실로 다시 오십니다. 성도는 이 말씀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절제하며 온전한 믿음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 힘을 쓰며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믿음을 지키며 세상 가운데서 핍박과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속히 오신다는 말씀은 놀라운 위로와 소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 상은 바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영생을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온전히 믿는 결단과 헌신 그리고 아름다운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상급을 속히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에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할까요? 다 팔자소관이니 그대로 살게 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시간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조차도 없을 정도로 예수님의 다시 오실 날이 멀지 않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날이 도래하기 전에 속히 죄악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라고 촉구하는 역설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광스러운 천국의 아름다움과 생활에 대해서 기록된 21장과 22장에 앞서 요한계시록 1장에서 3장까지는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세 개의 일곱재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각각 세 가지의 일곱 재앙은 심판이 목적이 아닌 모든 사람들을 회개로 초청하기 위하심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베드로후서 3장 9절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모두가 다 회개하여 천국의 영광에 참여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7절 말씀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는 말씀처럼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이미 심판의 메시지가 전해졌지만 아직 심판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회가 있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믿음이 온전히 복음에 굳게 서 있고 또 그것이 삶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둘째,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그 마음에 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전도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모든 죄를 용서함 받고 영생의 소망 곧 “생명수”를 받게 하는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일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굉장히 논란이 많은 책입니다. 교회 안에서 뿐만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논란이 되는 책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많은 이단들이 성도들을 미혹하는 방법으로 이 요한계시록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실을 경계하기 위해서 18-19절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는 이 말씀을 올바르게 읽고 올바르게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올바른 신앙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부터 종교개혁 전까지는 교회가 예배를 마칠 때마다 ‘아멘 마라나타’하고 예배를 마쳤다고 합니다. 이 마라나타라는 말은 오늘 본문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의 아람어 표현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버리지 말아야 할 좋은 전통도 버린 것들이 있는데 바로 이 신앙고백입니다. 이 종말지향적인 신앙고백은 요한계시록이 마지막으로 가르치고 있는 소중한 신앙의 유산입니다.
터키의 아르메니아에서 그곳에서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이 아르메니아의 나이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을 축도해 줄 일이 있었답니다. 그러자 이 할머니가 이렇게 화답했다고 합니다. 아멘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주님은 빨리 오십니다. 주님 속히 오시옵소서! 이분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르메니아가 지리적으로 아라랏산 너머에 있어서 5,500미터가 넘는 산의 천혜적인 지역 때문에 초대교회부터 간직해 온 신앙의 유산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계시록을 덮으시면서 그 속에 담긴 수많은 말씀들 기억하지 못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반드시 속히 다시 오실 것이라 약속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날마다 자기 옷을 빨며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건전한 종말론자로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그 소망을 많은 사람들에게 힘써 증거 하는 삶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