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20 /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
- 글쓴이 헝가리선교사 날짜 2013.05.20 06:59 조회 1,993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권력은 십년을 가지 못하고 꽃은 열흘을 붉지 못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권력이나 힘, 재물, 젊음은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사야 40장 8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는 말씀처럼 인생의 유한함을 나타낸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생각할 때 절대적인 가치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결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역사도 끝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류의 마지막에 대해서 기록한 책 요한계시록도 어느덧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마지막 진노가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는 ‘주 안에서 죽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그것을 쫓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복이 있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본문 15절 “보라 내가 도둑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마지막 때에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일곱 대접의 재앙’으로 나타날 것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큰 음성으로 이 모든 일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큰 음성은 바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과거 일곱 나팔의 재앙과 유사한 순서로 진행되고 있지만 차이가 있다면 일곱 나팔의 재앙은 1/3이라는 수치가 강조되는데 반해 일곱 대접의 재앙에서는 모든 부분으로 확대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마지막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재앙의 대상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2절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라고 국한지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출애굽 할 때의 마지막 재앙과의 유사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셨음에도 애굽의 바로는 더욱더 그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재앙으로 장자의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들을 구분하는 구분점이 바로 유월절 어린양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신이 그 집을 뛰어넘었고 이것이 바로 유월절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이 유월절의 절기와 마찬가지로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믿고 회심한 사람들은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게 되고 이 표식을 통해서 우리는 천국에 갈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성령님의 인치심을 받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거나 우상을 숭배한 사람들은 애굽에 내려졌던 장자의 재앙과 같이 영원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영원한 죽음의 형벌 가운데 2절에서 첫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절한 사람들은 ‘독한 헌데’가 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헌데는 살갗이 헐어서 상한자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욥이 이와 비슷한 ‘악창’으로 죽을 만큼 고난을 당하였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둘째 천사가 대접을 바다에 쏟자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어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본다이비치는 항상 사람이 북적이던 명소였습니다. 하지만 2012년 11월 28일경에 적조현상이 심각하여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적조현상은 식물성 플랑크톤이 과다하게 번식하는 것으로 물에서 악취가 나고 바닷물에 산소가 부족해져 주변에 있는 어패류는 떼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둘째 천사가 대접을 쏟을 때 특정한 바다가 아닌 모든 바다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연이어 셋째 천사가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매 피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은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물과 강을이 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의 낙후된 곳은 공동 우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우물이 오염이 될 경우 주변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되고 심한 경우 마을 전체가 몰락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8절의 말씀을 통해서 보면 넷째 천사가 대접을 쏟을 때에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007년에 7월에 동유럽 일대에 폭염으로 인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사망했던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헝가리에서도 약 5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지역의 기온은 42도 정도였다고 합니다. 42도만 되어도 사람들이 사망하는데 온도가 조금만 더 올라가면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에어컨을 켜면 되지 않겠냐고 하지만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여 그 세기가 5단계 이상이 되면 가전제품이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해진다고 합니다.
10절에 보면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쏟자 ‘그 나라가 곧 어두워지며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문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가 대접을 쏟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짐승의 보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세상 권세를 숭배케 하는 모든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두움이 임하고 사람들이 혀를 깨물 정도의 아픔 가운데 고통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1절에 그 아픈 것이 어떤 것임을 알려주는데 바로 ‘아픈 것과 종기’라고 기록합니다.
얼마 전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 엉덩이에 종기가 났습니다. 처음에는 소파같이 푹신한 곳에 앉을 때는 아프지 않고 딱딱한 바닥에 앉을 때만 아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소파에 앉을 때도 그리고 운전하기 위해서 자동차 시트에 앉아도 엄청 아팠습니다. 자세가 영 불편하고 잘못해서 종기 있는 곳을 살짝만 닿기라도 하면 찌릿한 통증이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혀를 깨물 정도의 아픔과 종기로 인해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모습은 몇 일전 제가 당했던 통증은 댈 것도 아닐 것입니다.
12절에 보면 여섯째 천사가 대접을 쏟자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 되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다섯째 천사가 대접을 쏟는 곳은 바로 ‘유브라데 강’입니다. 유브라데 강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접을 쏟자 강물이 말랐습니다. 그리고 그곳으로 동방의 왕들의 길이 예비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통해서 최후의 전쟁이라 일컫는 아마겟돈 전쟁이 준비가 됩니다.
사실 유브라데 강은 요한계시록 9장 14절에 언급된 여섯째 나팔의 재앙에도 언급이 됩니다. 하지만 나팔의 재앙은 네 천사가 큰 강 유브라데에 놓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게 되는데 이만만의 마병대가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불과 연기와 유황으로 사람 삼분의 일이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하나님의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위해 유브라데로 모여드는 점이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점에 13-14절의 말씀을 보면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나타나게 됩니다. 개구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부정한 동물이었고 또한 14절의 말씀에 ‘귀신의 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구리 같은 더러운 영이 ‘용’ ‘짐승’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용은 요한계시록 12장 3절에 언급된 사단을 의미하는 것이고, 짐승은 13장 1-10에 나온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나타내고, 거짓선지자는 13:11-17에 언급된 땅에서 나온 짐승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결국 악한 입을 통해서 세상의 왕들을 현혹시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합니다.
그리고 동조하는 왕들과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모이는 곳이 바로 ‘아마겟돈’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최후의 전쟁이 전개됩니다. 아마겟돈으로 언급된 곳은 현재 므깃도라는 곳으로 이스르엘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요새입니다. 가나안을 장악하려면 므깃도를 장악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므깃도는 전략적인 요충지였습니다. 고대로부터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수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구약과 신약전체로 현재까지 이곳에서 34번의 전쟁이 있었습니다. 므깃도 평야에 대하여 나폴레옹은 “전쟁을 위해 이곳보다 더 좋은 장소는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곱째 천사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자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8-21절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전무후무한 지진 있었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 지진으로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졌고 바벨론도 무너지고 각 섬도 산악도 사라졌고 하늘에서는 엄청나게 큰 우박이 떨어지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대접의 재앙을 통해서 지상의 피조세계는 파국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들이 심각하게 생각해볼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곱 대접이 마지막 재앙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다른 재앙과는 달리 모든 것이 사라지게 됩니다. 3절에 보면 “모든 생물의 죽었다”, 4절에 보면 “물 근원”, 20절에 보면 “간데 없더라”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과거의 재앙과는 달리 마지막 재앙이기 때문에 그 정도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회가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2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의 말씀처럼 구원의 날에 모두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런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5절의 말씀을 보면 “물을 차지한 천사가 가로되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라고 선포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7절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고 선포하는 내용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원수 갚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원수는 내가 갚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겨야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로우셔서 사사로이 원수를 갚지 않으시고 공평무사하게 모든 것을 선악간에 판단하시고 최후에 심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과 심판은 의롭고 참되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것들을 신뢰하며 그리고 그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러한 극심한 재앙 가운데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정확한 성경적 이해가 없으면 우리는 굉장한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지옥 가는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는 죄를 짓기 때문이고 또한 회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회개라는 것이 누구를 향한 말씀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인지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음을 믿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이야기 하면 이것은 분명한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울러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구원에 인간의 공로를 첨가하려는 인본주의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은 정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 하는 믿음은 역동적이며 그리고 강력한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령님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을 실제의 생활에서 실천하는 가운데 열매를 맺어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될 때 우리는 그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7장 20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처럼 우리가 맺는 열매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임을 증명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삶을 분리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은 행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다르고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지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게 되면 그가 하신 말씀을 온전히 지키게 됩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주일예배를 통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구원 받은 사람들은 주일예배를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면죄부를 사는 것처럼 헌금을 드린다고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의 삶이 살아있음이 증명 되는 것이 바로 헌금생활입니다.
이처럼 바른 믿음을 갖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가려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영원한 생명의 첫 열매가 되셨고 우리도 그와 같은 영원한 생명을 예수님 때문에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가장 복 있는 사람은 예수님 안에 죽은 자가 복이 있는 것이고 또한 살아가는 동안에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일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가 가려지게 되어 우리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서 어떠한 역경과 시련 가운데서도 굳게 붙들고 그리고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소망하면서 세상 가운데서 살아갈 것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축복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