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19 /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 글쓴이 헝가리선교사 날짜 2013.05.07 05:25 조회 2,251
이제 요한계시록도 중반부를 지나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신 천국의 아름다움이 기록된 마지막에 아주 가깝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1절 말씀에 언급되는 “마지막 재앙”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마지막 재앙”은 굉장히 혹독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요한계시록 6-16장까지 일곱 인봉,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재앙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재앙의 내용이 점점 더 가중되고 있음을 그동안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이제부터 시작되는 마지막 재앙은 악에 대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징벌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리고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파국적 종말을 맞이하는 장면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기억하면서 1절의 말씀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1절에 보면 이제 시작될 재앙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재앙은 과연 어떤 재앙인가요? 이미 주지하였듯 이 재앙은 일곱 대접의 재앙입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제 시작될 재앙에 대해서 이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적이라는 말은 요한계시록에 3번 등장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절 그리고 3절에 언급이 되었습니다. 특별히 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기이한 현상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대적한 세력이 모두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할 것을 고지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요한은 이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마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마지막 경고입니다.
5절 말씀을 보면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곱 대접의 재앙이 준비되어지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증거 장막이라는 표현은 스데반 집사가 사용했던 표현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성막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보면 증거 장막의 성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7장 8절을 보면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렸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출애굽기 38장 21절에서는 성막을 “증거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민수기 1장 50절, 53절 그리고 9장 15절에서도 성막을 “증거막”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보면 성막의 다른 이름은 증거 막, 혹은 증거의 장막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증거의 장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천지는 자신들의 교회를 ‘신천지 증거 장막 성전’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이유는 증거 장막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지이기 때문에 자신들의 교회를 신천지 증거 장막 성전이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 하는 증거 장막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 곳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을 중심으로 생활을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40장 36절-37절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진하는 길에 앞으로 나아갔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한 것처럼 광야에서 이동의 가부를 결정할 때 성막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천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끊임없이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성막은 그들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성막은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성막 안에 모셨던 언약궤에 담겨져 있는 물건을 보면 이는 더욱더 확실해집니다.
첫째가 언약의 두 돌 판입니다. 둘째가 만나를 담은 항아리입니다. 셋째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생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와 아울러 인간의 죄가 떠오르게 됩니다. 언약의 두 돌 판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절하였던 우상숭배의 죄가 떠오릅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불신앙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리고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죄악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러한 증거 장막 성전에서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일곱 천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있다고 했습니다. 세마포를 입고 금띠를 했다는 것은 구약시대의 왕적인 직분과 제상장적 직분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나오는 곳은 바로 성전입니다. 이것은 이 천사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뜻을 대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천사들이 성전으로부터 나올 때에 네 생물 중에 하나가 금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히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요한계시록 5장 8절에서 살펴보았듯이 금대접은 성도들의 기도를 담아 하나님께 드리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금대접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가득 담겨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일곱 대접의 진노의 심판이 요한계시록 5장 8절의 순교자들의 신원에 대한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핍박당하고 세상에서 멸시당한 것을 한동안 유행했던 말로 표현하자면 좌시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로마서 12장 19절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죄를 범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런 죄조차도 짓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의 억울함을 결코 간과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연기는 더 이상 일곱 재앙이 마칠 때까지 아무도 성전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광가운데 임재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고 아직 최후의 심판이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을 때는 아무도 성막 근처 혹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2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2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저 믿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그들의 믿음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그리고 믿음은 이성적인 언어규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역동적이고 믿음은 실제적이고 그리고 믿음은 구체적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믿음을 관념적, 추상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한 믿음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으로 끝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성경에 기록된 믿음을 통해서 얻는 여러 가지 축복을 얻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삶 속에서 늘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환난의 때에 그리고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 그리고 차마 거부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유혹 가운데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서서 귀한 찬양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2절에 사도 요한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같은 것입니다. 원래 이 유리바다는 요한계시록 4장 6절에 등장했었습니다.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유리바다가 이제는 불이 섞여 있다고 말씀합니다. 맑은 유리 바다가 불이 섞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뒤에 이어질 심판에 대한 전조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불타는 바다 가에 누가 서 있습니까? 그들은 쉽게 말해서 이긴 사람들입니다. 고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약할 때 강함 되는 진리를 붙잡고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이겼다는 말은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들 끝 부분에 후렴처럼 등장했던 이기다와 같은 말입니다. 주님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의 특별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이긴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이긴 것은 무엇입니까? 짐승입니다. 짐승은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의 우상은 땅에서 올라온 짐승이 우상을 만들고 그에게 경배하도록 했던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모방하는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의 종교적인 유혹을 이겼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이름의 수는 경제 활동과 관련되어 나타났었습니다. 경제적인 압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짐승의 수는 정치 경제, 종교적인 온갖 종류의 어려움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성도가 당할 수 있는 어려움과 유혹, 고통과 아픔을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가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도로서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들을 믿음으로 승리한 사람들, 그들이 누구입니까? 흰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유리바다 가에서 찬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유리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모세의 노래가 어떤 노래입니까? 출애굽기 15장에 등장하는 모세의 노래는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넌 후에 모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했던 바로 그 찬양입니다. 1세기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회당에서 안식일 저녁에 정기적으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모세의 찬양이 불타는 유리바다 가에 있는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들에 의해서 불려지고 있습니다.
또 어린 양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어린 양의 노래는 하나님의 백성이 사탄의 세력에게서 얻은 궁극적인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어린 양의 노래는 순결한 어린 양의 속성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 죄를 지고가시는 독생자 어린양을 생각나게 합니다. 결국 어린 양의 죽음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그것이 바로 어린 양의 노래인 것입니다.
결국 이 두 찬양이 의도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사탄의 그 어떤 도전에서도 결국 창조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승리하실 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끝까지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짐승의 수를 이긴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찬양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고난의 시대를 믿음으로 승리하라는 촉구입니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의 위협 가운데서 기이한 일을 통하여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들 스스로가 어찌할 수 없는 죄의 문제, 그리고 이 죄의 문제로 인해 당해야 할 영원한 형벌을 대신 지신 어린 양의 구속의 사건을 상기시킴으로 용기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할 때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극심한 핍박과 참을 수 없는 유혹을 이긴 사람들이 겨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사야 43장 21절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감사하고 그리고 찬양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타락하여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위해 만드신 에덴에서 쫓겨나 사탄의 종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허덕이며 탄식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래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 복된 일을 천국에 가서만 하려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미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기쁨을 맛보고 사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 땅에 발을 디디고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지속적으로 짐승과 짐승의 우상과, 짐승의 표와 치열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찬양입니다. 찬양할 때 능력이 생겨납니다. 찬양할 때 기쁨이 생겨납니다. 찬양할 때 소망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찬양할 때 대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찬양할 때 우리의 대적들이 패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날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복된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