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부활주일 /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기위해

▷ 본문 :로마서 8장 9절 - 11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3월 31일 주일


지금 우리가 본 영상은 ?전능자의 그늘?이라는 책을 쓴 짐 앨리엇이라는 선교사님의 삶을 영화로 만든 ?End of the spear?라는 영화의 일부입니다. 짐 앨리엇 선교사님이 순교를 각오하고 미개한 부족에 들어가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던 힘, 그리고 자신들의 남편을 죽인 극악무도한 사람들을 위해 자녀와 함께 미개한 부족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힘은 부활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부활절로 이 부활의 가치와 그리고 부활의 능력을 날마다 누리며 사는 삶을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오신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오셔서 예배를 드리는데 미국의 성도들은 기쁨으로 웃는 얼굴로 예배를 드리는데 왜 한국의 성도들은 예배드리면서 얼굴을 찌푸리고 울상을 지으면서 예배를 드립니까?”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변명하느라 우리 한국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바라보면서 항상 회개하느라 그렇다고 답변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미국 목사님이 그러면 한국 성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은 모릅니까? 미국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신앙을 받아 기쁨으로 예배드립니다.

샘 모리스는 예수님의 무덤이 유명한 이유는 그 무덤이 텅 비었기 때문입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믿음이고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이, 복음이 되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교리이거나 지어낸 것이라면 기독교는 그 순간 사라지고 맙니다. 희대의 사기극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절 예배는 언제나 다른 주일보다도 특별합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날에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런 기쁜 마음으로 옆 사람에게 이렇게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어서 참 행복합니다.”

그런데 제가 목회를 하면서 많은 성도님들을 만나보면서 부활절을 지키는 두 부류의 교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부활은 믿습니다. 그래서 부활절 예배를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는 못합니다. 이런 교인의 부활절 예배는 엄숙하기만 합니다. 기념식일 뿐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부활하셔서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교인입니다. 이 사람들에게 있어서 부활절 예배는 기쁘고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왜냐하면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의 생일을 축하할 때, 생일의 주인공이 함께 하는 생일잔치는 떠들썩하고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생일의 주인공이 만약 사고로 인해서 죽었다면 아마도 생일잔치는 분위기가 엄숙할 뿐입니다. 부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가운데 계속 머물러 계신다고 하면 우리가 예배하는 이 시간은 너무도 불필요한 시간이고 그리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죽음 가운데 머물러 계시지 않고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까? 기도가 부족하여 그렇습니까? 성경을 읽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십자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란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과 하나된 것입니다. 로마서 63-4절에 보면 우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죽었음을 믿지만 자기도 죽었다는 사실은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분명치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부활도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613절을 보면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라고 분명히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부활은 십자가 다음에 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예수님의 부활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음이 분명해야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십시오. 우리가 죽었습니까? 지금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바로 다음 말씀에 답이 나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인 우리는 새로운 인생의 가치를 가지고 삽니다. 과거 우리는 돈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과거 우리는 명예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과거 우리는 권력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과거 우리는 힘의 가치를 가지고 세상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믿음,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원리입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 우리가 가져야 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씀처럼 나는 죽고 예수님으로만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이중표 목사님은 별세신학으로 유명하신 분이십니다. 별세신학이란 바로 사도바울의 이러한 고백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표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동안 별세를 외쳐오기는 했지만 내 속에는 죽지 않고 이 땅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으려는 소원이 많음을 나는 깨달았다. 개인적인 욕심과 욕망은 많이 죽이고 있었지만 아직까지도 대의명분을 앞세워 죽이지 못하고 있던 것들이 많음을 발견했다.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역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고상한 목표를 내걸고 이생의 자랑스러운 탐욕이 너무 많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과는 다른 것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은 일반적인 것이요 윤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신령한 것과 성스럽게 살려고 하는 종들 속에 감추어진 악은 하나님의 것을 사유화하려는 탐욕이다.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 성자는 성스러운 사기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암으로 인해서 4번씩이나 죽음의 문턱을 경험한 이중표 목사님은 때론 주님을 위하고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도 욕심이 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날마다 나를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성령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거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성령으로 충만한 것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된 단어가 있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혼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은 모두 성령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1절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부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10절 말씀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충만한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첫째, 로마서 85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라는 말씀처럼 지속적으로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자 하는 속사람과 세상 법을 따르고자 하는 겉사람이 항상 싸움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의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지속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신령한 젖에 목말라 매일매일 간절히 구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주찬이는 참으로 신기합니다. 물이 있을 때는 음료수를 찾습니다. 그런데 음료수가 있을 때는 물을 찾습니다. 그래서 앞에 아이스티가 있어도 물이 먹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아이스티는 보지 않고 계속 물을 달라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눈앞에 있는 세상의 달콤한 것들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목마름을 채울 수 있는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별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이 무엇을 기도하는지를 들어보면 압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하늘의 것 신령한 것을 가장 먼저 간구하는 영에 속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삶에 예배가 최우선이 되는 삶입니다. 예배가 무너진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참된 진리가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입술로 주님을 고백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예배를 사모합니다. 지금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봅시다. 나의 예배 생활은 과연 어떠한가?를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다같이 저를 따라하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살면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면 가정이 살고, 예배가 살면 나라가 산다. 그렇습니다.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것에 우리의 우선순위를 두는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헌금 드리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 하자 자신의 물건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즐겨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역을 후원하기 위해서 아낌없이 후원을 했던 모습이 나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 앞에 즐겨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된 삶 즉,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강력한 폭발력이 있는 다이나마이트로 묘사되고 실제로 헬라어로 성령을 두나미스라고 하는데 다이나마이트가 내 안에 있는 사람은 강력한 폭발이 있어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 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날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며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야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의 귀한 열매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판단한다고 성경은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우리가 지금 맺고 있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기도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기도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예배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헌금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전도의 열매는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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