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종려주일 / 십자가 그 사랑이

▷ 본문 :마태복음 27장 32절 - 44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3월 24일 주일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사역을 위하여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실 때 온 백성이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종려나무 가지를 예수님이 지나시는 길 앞에 놓았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축제와 같은 날이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 날은 고난주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토대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얻으셔야 할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을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의롭다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이러니 하게도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으로 죽기 위해서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십자가는 바로 이 예수님을 처형한 형틀입니다. 옛날 페르시아나 로마에서는 십자가형이 죄인에게 행하던 가장 극악한 처형방법의 하나였습니다. 하도 처참하여 이를 본 사람은 일생을 두고 악몽에 시달렸다 합니다. 심지어 로마 황제 가운데도 십자가 처형을 본 뒤로 식사 중에 십자가 소리만 나와도 상을 물리고 노발대발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끔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죄인을 오래오래 죽어 가도록 합니다. 십자가에 매달아놓고 서서히 굶어죽게 합니다. 나중에는 까마귀가 모여들어 살을 쪼아 먹게 됩니다. 때로는 매달아 놓고 창으로 찌르고 매를 때려서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잔인한 방법은 손발에 못을 박아서 매달아놓는 것입니다. 못을 박았다고 하여 쉽게 죽지는 않습니다. 못 박힌 곳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못 박힌 곳으로 몸의 피가 빠져나가 마침내 죽고야 맙니다. 어떤 경우에는 일주일이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아서 꿈틀거린다고 합니다. 단번에 죽는 것도 힘든데, 의식이 생겼다 죽었다 하면서 일주일이나 죽음의 고통을 겪게 하다니 참으로 잔인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가 생명을 빼앗는다는 데에 앞서 명예와 의를 빼앗는다는 사실에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굴욕입니다. 부끄러움을 줍니다. 십자가를 져야할 죄인은 모든 옷을 탈의합니다. 화가들은 십자가 그림을 그릴 때 너무나 민망스러워 옷자락으로 치부를 가립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발가벗겨서 길거리에 매달아 놓는 것입니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모두가 그 수치를 봅니다. 이것은 죄인을 두 번 죽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명예를 빼앗고 욕을 보입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에 기인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보면 나무에 달린 사람은 저주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대제사장과 종교지도자들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로마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목은 자신을 하나님으로 주장한 신성모독과, 율법과 안식일을 어기고 사람들을 잘못 이끄는 이단 죄였습니다. 이러한 죄목을 씌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은 바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버리시고 저주한 사람으로 증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정말 나무에 달려 죽어 저주를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말한 신성모독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어기고 안식일을 무시하며, 무지몽매한 백성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이단성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생각은 예수님이 신성모독과 율법을 어긴 죄로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나무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범죄 한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저주에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죄로 인해서 나무에 달려 죽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대신하여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나무 십자가는 율법으로 보면 저주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가 우리 위해 대신 저주를 받고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오히려 밝히 보여주는 상징이 된 것입니다.

칼 바르트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십자가에서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내 죄의 무게를 생각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값을 치르지 않고는 전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 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경중에 따라 형을 정하는데 십자가는 가장 끔찍한 형틀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혀야 한다면 내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사람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5: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죄의 무게가 크게 느껴질수록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더욱더 크게 느껴지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는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내 생의 가치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값을 지불해서라도 구원해 낼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치르신 엄청난 값이 십자가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60세가 된 베노즈델 부부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노즈델 부인은 1000명에 1명꼴인 특수 혈액형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병원에서 긴급한 요청이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수혈을 해주었습니다. 그런 후 부인은 나이도 많은데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해 한동안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남편은 수혈을 받은 사람이 가족 간의 불화로 칼부림을 하다가 다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났습니다. 그는 저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 이토록 선한 내 아내가 왜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라며 화를 냈습니다. 바로 그때 설경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십자가의 형틀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일 뿐만이 아니라 최후의 심판 후에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을 영원토록 경험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인하여 우리는 무한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아무런 느낌과 아무런 생각이 없이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채찍에 맞을 때 아무런 아픔도 겪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실 때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벌거벗겨져서 십자가를 지실 때 수치스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에서 양 손과 양 발에 못 박히실 때의 아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옆구리에 창을 맞아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상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극심한 갈증을 호소할 때에도 그 갈증의 정도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몸이 축 늘어져 혈류가 증가하여 안압이 상승하고 그리고 횡격막을 압박하여 호흡이 가빠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를 오래 다니고 오랫동안 십자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다보니 어느 순간 십자가에 대해서 무감각해졌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볼 때 마치 몇몇 오래된 부부가 서로에 대한 끌림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닌 의리 혹은 의무감에 사는 것처럼 무감각하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사망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하십니다. 내가 살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무지한 사람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와 하나님임을 증명하라 합니다.

얼마 전 일본에 있었던 지진에서 한국분이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으로 일본에서 무역업을 하며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는데 지진이 일어나기 전 예고방송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진이 나면 들고나가기 좋게 007가방에 돈과 각종 서류들을 넣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지진이 나자 건물이 흔들리면서 집안에 있는 가구들이 춤을 추더랍니다. 그리고 자신도 벽에 두어 번 부딪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벽에 두어 번 부딪히니 지성은 온데간데없고 생존본능만 남아 자신이 준비한 007가방을 들고 계단으로 전속력으로 달려 건물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잠시 뒤에 자신이 나온 출입구로 건물의 잔해가 무너지면서 분진이 쏟아지는데 그 안에서 한 사람이 기어서 나오더랍니다. 자세히 보니 자신의 아내였습니다. 지성이 사라지고 생존본능으로 인해서 자신의 아내를 버리고 가방만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자신의 아내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지성은 너무도 얄팍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을 인하여 예수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와 같은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구원 얻은 우리에게는 능력이 되지만 구원 얻지 못한 세상 사람들에게는 조롱거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지워졌던 저주를 담당하시고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 감사해야합니다. 한 강도처럼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려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 절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목 놓아 외쳐야 합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안됩니다. 예수님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가 십자가를 지는 것도 참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당신의 독생자를 외면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그리고 죽음을 통해 그 사랑을 몸소 증명하신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진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고난주간을 맞이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한 주간 되었으면 합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습니다. 큰 기쁨 가운데 부활절을 지키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며 예수님과 함께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내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영상을 보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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