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13 / 두 증인과 회개하는 사람들

▷ 본문 :요한계시록 11장 1절 - 19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3월 10일 주일


지난 주 우리는 반드시 이루어질 예언을 이미 소유한 사람들로서 가져야 할 책임의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날마다 먹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는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증거 하는 삶입니다. 이 두 가지가 마지막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은 여섯째 나팔의 재앙과 일곱 번째 나팔의 재앙 사이에 삽입된 말씀으로 두 증인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의 말씀을 보면 두 증인이 활동하기 전에 성전을 측량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1절과 2절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1절은 경배하는 자들에 대한 기록과 2절은 마흔 두 달 동안 성전이 짓밟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요한이 이 계시를 받은 때는 기원 후 95년경으로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25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 없어진 상황에서 요한에게 성전과 재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새 성전이 건축되어진다는 전제하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본문의 성전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온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절과 2절을 보면 성전을 측량하는 범위가 나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을 측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방인에게 주어 거룩한 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 많은 분들은 1절은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으로 해석하고 2절은 세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극심한 재앙이 임할 것이라 해석을 합니다. 이러한 해석이 그렇게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2절 마지막 부분에 이방인들이 짓밟는 그 곳이 거룩한 성이라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보통 성경에서 거룩한 성은 예루살렘 성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교회입니다. 1절에 하나님께서 지키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도 교회이며, 2절에 짓밟힐 것이라 말씀하신 곳도 교회입니다. 그럼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요한계시록만 오랫동안 연구하여 많은 분들이 세계적인 학자로 인정받고 있는 리차드 보캄 교수는 “1절을 교회의 내면적인 부분이며 2절은 교회의 외적인 부분이다라고 해석을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때론 하나님의 사람들을 고난의 풀무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 성도들의 신앙이 정금같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 고난의 때에 우리는 극심한 영적인 전쟁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적인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우리에게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시기 원하십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에 언급된 144,000이라는 수는 민수기에 언급된 숫자인데 이 숫자는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자신들의 군사력으로 이긴 전쟁은 하나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계수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전쟁터로 그 사람들을 이끄시는 것일까요? 그리고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최후의 전쟁에서 사단의 권세를 물리치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현장에 부르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승리의 현장에 하나님의 사람들도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기쁨을 사람들과 나누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회는 이 땅에 전투적 교회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 끊임없이 영적인 전쟁을 해야 하는 교회,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또한 우리의 운명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인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이 된 전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내면을 지키심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전쟁은 이미 승리가 보장이 되어있다 하더라도 때론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외적인 부분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치열한 전쟁을 통하여 교회는 정금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단단하게 변모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3절부터 두 증인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하는 날이 1,260일입니다. 달리 계산해보면 42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역을 감당하는 두 증인은 과연 누구인가가 문제가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두 증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4절을 보면 두 촛대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촛대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왜 둘이라는 숫자를 강조하는 것일까요?

많은 학자들이 둘이라는 숫자를 증인의 수라고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둘씩 짝지어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시대의 율법에서 증언으로서의 효력을 가지려면 둘 이상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 최소한 두 명의 증인이 증언하는 것만을 증언으로 채택했습니다. 따라서 두 촛대는 곧 증언하는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달리 말하면 전도하는 교회, 복음증거의 사명을 가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이런 사명을 가진 교회의 모습에 대해서 성경은 굵은 베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상복을 입었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겸손과 회개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서 담대하게 회개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한 때 두 때 반 때를 살고 있는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부분입니다. 교회는 굵은 베옷을 입고 말세의 기간을 지내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로 옷 입고 죄를 슬퍼하는 거룩한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언하는 능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라고 부릅니다. 이건 스가랴서 4장의 내용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성경학자들을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일곱 등잔을 가진 등잔대와 함께 등잔대 좌우편에 있는 두 감람나무를 봅니다. 스가랴가 천사에게 이 두 감람나무의 의미가 뭐냐고 묻자, 천사가 스가랴 4:14 “이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라고 대답합니다.

스가랴 4장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 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정치지도자 스룹바벨을 말합니다. 다윗왕의 후손인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포로귀환 후에 전쟁으로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런데 포로로 있다가 귀환한 사람들에게 성전재건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래서 스가랴는 겸손히 성전 재건은 스가랴 4:6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는 고백처럼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즉 성령의 역사로 완성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두 증인을 두 감람나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성전건축을 완성하는 것과 같이 두 증인이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에서 예언 사역을 완성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처럼 교회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세계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는 행사가 아니라 성령충만을 통해 세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령의 권능을 통해 세상을 향해서 강력한 능력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을 56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서는 엘리야의 사역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열왕기하 1장에 보면 아하시야 왕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섬기려 한 것에 대해 엘리야가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증거합니다. 그러자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병사들 보냅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병사들을 태워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6절에도 엘리야가 행한 일로 삼년 동안 하늘을 닫아 가뭄이 들게 하였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리고 6절 하반절에는 출애굽 당시 이집트 바로 왕을 상대로 한 열 가지 재앙 중 물이 피로 변하게 되는 사건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교회가 이런 기적을 행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가 애굽 왕 바로와 가졌던 그 적대적인 관계, 또 엘리야가 아합의 통치 시절에 그렇게 싸워야 했던 모습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래서 세상을 향해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는 치열한 전투가운데 있는 전투하는 교회인 것입니다.

그런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7절부터 보면 마지막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 짐승으로부터 교회가 핍박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20장에서 짐승이 1000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1000년이 차서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것과 같은 사건입니다. 짐승은 무저갱에서 나와 만국을 미혹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두 증인은 영적으로는 소돔 혹은 애굽이라고 하며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두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길거리에 버려둡니다. 교회에 대한 최대한 모욕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길거리에 나둥그러져 있는 두 증인의 시체를 백성들과 족속들과 방언들과 나라들로부터 구성된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두 증인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괴로워했다는 것은 복음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나게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죄를 회개하기는커녕 몹시 싫어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환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소멸되거나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삼일 반이라는 시간은 삼년 반이라는 1,260일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것은 영광의 기간은 길지만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기간은 짧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두 증인은 하나님의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서 발로 일어서게 됩니다. 그러자 비로소 구경하던 백성과 방언과 나라들이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활하여 승천할 때 원수들이 구경하고 그때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 반응은 9:21절에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던 모습과는 확연하게 대조되는 반응입니다.

요한계시록 9장까지는 여러 가지 재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 나팔, 대접 등 그러나 심판의 결과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하지만 두 증인의 사역으로 회개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돌이킬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어려움을 겪을수록 마음이 더 강퍅해져서 끝까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증인의 복음증거 사역을 통해 택하신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 즉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바로 교회의 복음 증거를 통해서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복음증거사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하신 일을 선포함으로 세상으로 하여금 회개와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이 위대한 복음증거의 사역에는 교회가 치러야 할 희생과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교회가 박해를 받는 동안에도 신실하심으로 교회의 믿음을 지켜주시고 보호하십니다. 붙들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의 두 증인으로서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을 향해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담대하게 증거하고 마침내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일에 우리 모두가 귀하게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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