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8 / 인치심을 받을 사람들
- 글쓴이 헝가리선교사 날짜 2013.02.08 21:05 조회 3,060
지난주 우리는 요한계시록 6장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누구도 능히 설 수 없음”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능히 그 앞에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 새롭게 된 사람들만”이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을 보면 인치심을 받은 144,000에 대해 언급되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각 시기마다 여러 종류의 이단이 기승을 부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단들이 집착하는 것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숫자입니다. 그 날과 그 시에 대해서, 666,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온 140.000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사실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은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이단들을 양산해 내었던 문제의 본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주 말씀에 집중해야 하지만 오늘은 특별히 더욱더 집중해서 함께 말씀을 상고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절의 말씀을 보면 “이 일”이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번째까지 인을 떼는 내용이 기록된 요한계시록 6장 전체를 받는 말씀으로 일곱 번째 인을 떼는 8장 사이에 일어난 일임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네 천사가 바람을 붙잡고 바람을 불지 못하게 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온 세상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천사들은 세상을 큰 재앙으로 심판하려 합니다. 그 도구를 성경은 바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람은 파괴나 재앙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바람의 위력을 최근에 일어나 재해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미국남부를 회복불능의 상태로 만든 카트리나, 그리고 작년 여름에 아파트 외관의 창문들을 종이장 처럼 날려버린 태풍 볼라벤 등 바람은 굉장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는 이사야 11:12절 “땅 사방에서와”라는 말씀처럼 세상의 모든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네 천사가 사방의 바람을 붙잡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2-3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천사가 그 네 천사를 향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하지 말라”고 큰소리로 외쳤기 때문입니다. 즉, 원래는 심판하기 위해서 왔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심판을 보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난 주 우리가 함께 상고한 요한계시록 6:11절의 말씀과도 똑같은 말씀입니다. “그 수가 차기까지”심판을 지연시키신 하나님의 모습이 7장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분명히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는 그의 책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재앙이 아니라 평안과 미래, 그리고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읽기를 주저하고 그리고 가르치기를 주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교묘하게 가르치는 이단들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모든 주제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록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는 말씀처럼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심을 확증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멸망치 않고 모두가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집행하려 바람을 잡고 있는 천사를 명하여 심판을 잠시 유보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7:10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행할 네 천사를 향해 잠시 멈추라고 명한 천사의 손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이 들려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인은 소유를 구분하기 위해서 사용한 것입니다. 오늘날은 가축에 칩을 심어 자신의 소유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또한 그 가축의 모든 정보를 칩에 담아 관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칩이 개발되기 전에는 가축의 소유가 애매하여 다툼이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각자 자신의 집안의 고유한 문양을 만들어 가죽이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인두로 문양을 새기는 작업을 했습니다. 이것을 가르켜 인을 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 인을 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가장 문제가 되는 요한계시록 7:4절의 말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이단들이 가장 집착하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부다페스트한인선교교회에 출석하지 않으면 144,000에 들지 못한다거나 주일 예배에서 빠지면 144,000에 들지 못한다고 이야기하면 이것은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일 예배에 빠지는 것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4장에서 살펴보았듯 이후에 우리가 할 일이 예배이며, 찬양받으시기 위해서 우리를 만드셨다면 예배를 소홀히 여기는 사람이 144,000에 들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도 조금은 무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에게 가장 우선되는 가치는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되는 144,000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7:4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144,000”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과 그리고 숫자 144,000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해석은 본서에서 가장 난해한 해석 중의 하나로 일반적으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혹자는 이스라엘을 문자적 의미로 취급하여 유대인 성도들로 해석합니다. 둘째, 혹자는 ‘이스라엘’을 문자적 의미가 아닌 영적 의미로 해석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서 저는 후자가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14:4, 15:1, 21:9-12의 말씀을 보면 교회는 어린양의 신부로, 새 예루살렘 성으로 표현되고 있으며, 예수를 따르는 자를 참 이스라엘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5-8절까지 언급된 12지파명도 구약성경에 나타난 12지파명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20-43, 47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르우벤, 시므온, 유다, 잇사갈, 스블론,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단, 아셀, 갓, 납달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보면 구약에 언급된 지파 중 요셉지파와 레위지파가 언급되고 상대적으로 에브라임, 단 지파는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 7장에 언급된 12지파 중 단지파와 에브라임 지파는 언급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혹자는 '단'이 부주의로 '만'(man,'사람')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들은 창 49:17절의 말씀과 삿 18장에 나오는 말씀을 근거로 단지파가 우상 숭배로 인해서 고의 적으로 제외시켰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 가운데 대다수의 목사님들이 단 지파는 우상숭배로 인해서 인침을 받은 12지파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동시에 등장하지 않고 본문에서 에브라임은 생략되고 대신 요셉이 삽입되어 있는데, 호 4: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두라”는 말씀처럼 에브라임 지파도 단 지파와 마찬가지로 우상 숭배로 인하여 생략되었습니다.
특히 레위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에 소속되지 않은 지파였지만 요한계시록 7장에는 레위 지파가 삽입되었습니다. 요셉 지파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로 나뉘어 12지파에 들어가고 레위 지파가 12지파에서 빠져 제사장 지파로서 신분이 격상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레위 지파가 삽입되어 혈통적 제사장 지파가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144,000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통상 여기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인데, 첫째, 순교한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이스라엘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144,000도 문자적으로 인치심을 받고 보호함을 받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합니다. 셋째,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144,000을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완성된 교회로 해석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 가지 견해 중 마지막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으로 많은 목사님들이 이야기합니다. 한편 144,000에 대한 상징적 숫자 해석은 구약의 12지파, 신약의 12사도로를 곱한 수에 완전수 1,000을 곱한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 받은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고 이야기 하는 분과, 하나님의 수 3과 땅의 수 4를 곱한 수가 완전수인 12이며, 이 12의 제곱과 충만 수 10의 세제곱이 곱해져서 144,000이 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리고 144,000을 예수님의 재림으로 인해 믿는 사람들이 다 올라가고 남은 사람들 가운데 7년 환난이 이루어지는데, 전 3년 반 동안 이삭줍기를 통해서 구원을 얻을 사람들들 곧 유대인을 가리킨다고 이야기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그런데 그 수는 바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수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삼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수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적은 수의 무리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들의 집단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성경을 완전히 잘못 해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은 해당 구절 하나를 가지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구절 전후의 문맥을 살피고 또한 관련된 말씀이 다른 곳에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살펴야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단들은 144,000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다음 9절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보좌 앞에 설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10절의 모습처럼 찬양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서 언급되어진 숫자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보좌 앞에 서기 위해서 그리고 그 앞에서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 셀 수 없는 큰 무리의 특징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흰 옷을 입었습니다. ‘흰 옷’은 정결과 승리를 상징하는 옷으로 예수님의 구속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 ‘종려가지’를 들고 있었습니다. ‘종려가지’는 요 12:13 일반적으로 승리나 기쁨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즉, 예수님의 피로 구속함을 받아 흰 옷을 입은 허다한 무리들은 하나님과 어린양의 구속하심에 대해 보좌 앞에서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13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셀 수 없는 무리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문제의 핵심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6장에서 누가 이 진노의 큰 날에 설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그 진노의 날에 구원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노의 큰 날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 피로 씻음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뒤의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신약 교회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약 교회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까?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약은 누구든지 어린양의 피에 그 죄를 씻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7장의 무게 중심은 십사만 사천 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고 있는 흰 옷을 입은 큰 무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사도 요한은 누가 이 진노의 날에 승리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사람들이라고 답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16-17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는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이러한 놀라운 축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서 구원받은 감격가운데 그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받는 복입니다. 그들은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신실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눈물 흘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고, 멸시를 받고, 손해를 받고, 따돌림도 받았던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았던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인치심을 받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의 보혈로 구속을 받고 마 5:11-12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는 말씀처럼 예수님만이, 복음만이 나의 삶에 최고의 가치임을 고백하며 신실하게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우리는 숫자에 연연하지 말고 오직 이 인치심을 받아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스러운 복을 누리기 위해서 언제나 믿음의 선한 경주를 최선을 다해서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