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6 / 승리하신 예수님처럼
- 글쓴이 헝가리선교사 날짜 2013.01.22 01:20 조회 2,473
▷ 본문 :요한계시록 5장 1절 - 14절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1월 20일 주일
계 5:1-14 / 승리하신 예수님처럼
교회 셀모임에 나오시는 분 중에 헝가리에 오시기 전에 역사 선생을 하셨던 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익히 알고 있던 ‘적자생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말은 적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연하여 “역사는 승리한 사람의 기록이다”라는 말도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기도 했고 공감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계 5:5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라고 기록된 말씀을 보면 승리하신 예수님에 대한 기록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갖은 죄목을 덧붙여 십자가에 못박을 때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면 모든 것이 끝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골 2:15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는 말씀처럼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을 무력화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흔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도’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한자 거룩할 성과 무리 도를 합한 것으로 “거룩한 도를 쫓는 무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낸 말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그리고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구원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로 영광된 명칭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바로 “승리”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엡 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는 말씀처럼 언제나 치열한 영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전쟁터와 같은 곳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사는 성도로 굳게 서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책”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책은 일곱 인으로 봉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책은 6장부터 시작될 종말의 시나리오가 담긴 책으로 8장에서 마지막 인이 떼어지고 10:2절에서 드디어 책이 열리게 됩니다. 특히 6장부터는 이 책을 인봉한 인들을 뗄 때마다 일어나는 심판에 대한 말씀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떤 책일까요?
계 20:12을 보면 하나님의 보좌에는 두 개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는 행위록의 책이고 또 하나는 생명록의 책입니다. 계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하는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책은 계 20:12에 언급된 행위록 혹은 생명록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앞서 계 5:3의 말씀을 보면 이 책을 펼 사람이 없음을 인하여 크게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을 울게 만들었던 이 책은 과연 어떤 책일까요?
겔 2:9-10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 마리 책이 있더라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그 위에 애가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그렇습니다. 이 책은 바로 심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책입니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라는 신학자는 이 책이 손 안에 잡혀 있지 않고 손 위에 있음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책을 두루마리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에스겔에 기록된 말씀처럼 이 책은 두루마리이고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애기와 애곡과 재앙’이라는 심판의 메시지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주장에 상당한 신빙성이 있는 것은 6장부터 이 책의 인을 떼면 재앙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책에는 재앙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을까요? 요한이 보았던 것처럼 그 책은 인봉을 했기 때문에 그 안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서에 보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과 비슷하게 책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책도 역시 봉인된 책입니다. 단 12:4,9을 보면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계시 히시고 그 내용을 “봉함”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과 다니엘에 나온 말씀을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다니엘에서 말씀하고 있는 정한 때의 끝은 ‘작은 뿔로 상징되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한 이야기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행하는 온갖 박해의 끝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즉, 재앙에 대한 것만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그 재앙의 결국, 곧 끝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하나님의 구속으로 완성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 있는 봉인된 책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지만 그 심판은 반대로 하나님의 구속의 날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는 심판의 때이며 모든 것이 끝이 나는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성도들에게는 마지막 때는 승리의 날이며 구원의 완성되는 날, 즉 영광스러운 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처럼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갖고 그리고 그 날을 고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에 대한 말씀을 증거 하면서 ‘요한계시록’은 희망의 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알려주는 경고의 책이 아니라 세상 가운데 어떤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 기록된 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계 5:1에 기록된 이 ‘봉인된 책’은 세상을 향해서는 심판의 책일 수 있지만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속에 대한 소망을 증거 하는 귀한 책이라 생각합니다.
요한이 이 책,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핍박은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차원을 넘어 죽음에까지 이르는 엄청난 댓가를 요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글을 기록하고 있는 요한도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최후까지 남아 갖은 핍박을 받고 심지어 죽임을 당했지만 죽임을 당치 않고 유배지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고백하며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을 알려주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을 천국으로 이끌어 올리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앉으신 보좌를 보도록 하시고 그리고 그 손에 들려 있는 책을 보도록 하십니다.
믿는 우리들에게 반드시 되어져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입니다. 예수님의 다시오심이라는 말 안에는 구원과 함께 심판이라는 말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우리는 너무도 기다려지고 그리고 당연히 이루어질 이 일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에게 특히 사단에게는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날은 심판의 날이기 때문이며 결국 사단이 불못에 던져질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의 계획이 기록되어진 이 책을, 모든 믿는 사람에게 소망이 되는 이 책을 아무도 펼 사람이 없음을 인하여 요한은 크게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책은 언제 열려지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라고 대답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행 1:7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 때는 하나님께서만 아십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정하시지만 그 날을 모른다고 해서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은 살전 5: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봉인된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책을 여실 분이 누구냐는 것, 이것이 중요합니다. 카멜롯의 전설과 비슷합니다. 아더 왕에 대한 전설의 주인공인 아더 왕에게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아더가 바위에 박혀있던 칼을 뽑은 사건입니다. 대리석처럼 크고 네모난 바위 중앙에 칼이 꽂혀있고 그 칼에는 “이 칼을 뽑는 자야말로 잉글랜드이 왕이다”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칼을 뽑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도 칼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칼에 얽힌 사연은 전혀 모르는 아더가 칼자루를 잡았더니 칼이 쑥 뽑히게 되었고 결국 그는 영국의 왕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칼일까요 아니면 아더라는 인물일까요? 마찬가지로 ‘봉인된 책’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책을 여실 분 예수 그리스도가 더 중요합니다.
계 5:5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다윗의 뿌리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리고 완성되었습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처음과 마지막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완성된 것입니다. 이 말은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이 책을 펴실 수 있고 그리고 그 인을 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만 이 책을 펴시고 그 인을 떼실 수 있을까요? 본문에 보면 “이기었으니”라는 조건이 나옵니다. 이 책을 펴고 인을 뗄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이긴’ 존재에게만 주어집니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예수님께서 온전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히 2: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라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마귀를 멸하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완벽하게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이기셨습니까? 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하신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예수님을 어린양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린양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린양은 제물을 의미합니다. 죄인들을 위해 대속 제물로 드려질 양, 이것이 바로 어린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린양이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의 어린양이 되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권을 행사하시는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도래시키시는 방법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일찍”이라는 말은 사도 요한이 보고 있을 때가 아니라 이미 죽임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로 이뤄집니다.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의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이 피 값으로 지불하셔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영이나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해서 세상을 없애 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런 충분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시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사서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요한계시록 1장에 나왔던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가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세상의 방법으로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성도다워야 합니다. 나는 성도라는 생각이 저와 여러분들의 삶을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권력이나 힘, 돈으로 하나님 나라는 커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 즉 낮아짐, 겸손, 사랑, 온유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끝으로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찬양과 예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9-14절까지 이어지는 찬양을 함께 살펴보면 이 부분에서는 세 번의 찬양이 나옵니다. 첫 번째 그룹은 이십사 장로와 피조물들의 대표인 네 생물입니다. 두 번째 그룹은 보좌와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입니다. 세 번째 그룹은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찬양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찬양에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담겨있습니다.
첫째는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어린 양에 대한 것입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셔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이 찬양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라고 말씀합니다. 모두가 어린양에 대한 찬양입니다.
두 번째는 고난당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께 온전히 상달되어 언제든지 그 기도에 응답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성도들의 기도 특히 인봉을 떼기 시작하고 정한 때가 오기까지 성도들이 고난당하는 시기에 하나님께 올려진 기도는 향이 되어 하늘 성소에 상달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6-16장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성도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으로 예수님처럼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첫째, 기도해야합니다. 기도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길을 우리도 걸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는 길은 바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로 갈 때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