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5 / 이후에 마땅히 될 일

▷ 본문 :요한계시록 4:1-11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3년 1월 13일 주일
4:1-11 / 이후에 마땅히 될 일

다는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인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의 지성사가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가보지 않은 곳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신대륙이 발견 되었고 그리고 남극과 북극을 탐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동물에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동물들의 습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인류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많은 것들이 발명되어 사람들을 좀 더 편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호기심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많은 유익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기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지만 그러나 그 대답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 때문에 혹은 너무나 형이상학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쉽게 포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죽음 후에 혹은 인류의 종말 후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한 호기심입니다. 이런 호기심 혹은 궁금증에 대해 오늘 본문은 명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하늘의 열린문에 대한 언급이 있고 또한 그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늘로 올라간 목적을 저자 요한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잘 들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호기심 중 가장 큰 장차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어질 것입니다.
4:1을 보면 예수님께서 초청하셔서 하늘로 가는 과정에서 그냥 올라가면 되는데 유독 본문은 열린 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열린 문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말씀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행 7:56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성난 군중들 사이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던 스데반 집사가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 뱉은 일성입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혹은 돌에 맞는 고통을 토로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문이 열리는 영광을 보고 감격하며 행한 고백이었습니다.
하늘의 열린 문이것은 하나님께서 계신 곳을 들어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것임을 성경은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늘의 문은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문은 자격이 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데 바로 하늘의 문이 바로 그런 문입니다. 이 문을 통과해야만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이 문을 통과할 자격을 갖게 될까요?
이런 질문에 우리는 계 4:2 “성령에 감동하였더니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현장에서도 동일한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 하늘의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을 헬라어 원어는 성령 안에 있게 되었다.”라고 표현합니다. 날마다 성령님의 임재를 기대하며 성령님의 임재가운데 살기 위해 몸부림 칠 때 우리는 열려 있는 하늘의 문을 보며 또한 그곳을 통과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확증하고 또한 날마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케 하는 일을 도우시도록 다른 보혜사로 임하신 성령님의 역사가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이 완성되는 영광스러운 일을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문을 통과해야만 천국의 영광스러운 날들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요한이 하늘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서 무엇을 보게 됩니까? 바로 하늘에 베풀어진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서 직접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석으로 그리고 무지개가 그 보좌를 두르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상징적으로 보좌에 앉으신 분을 표현하고 있을까요?
요한은 예수님의 초청에 의해서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아직 그가 구원의 완성인 영화의 단계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란 의미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제하면 다음의 말씀들을 통해서 요한이 보좌에 앉은 분을 보석에, 그리고 무지개가 그 보좌를 두르고 있다고 표현 한 것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빛의 근원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천국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강력한 빛이신 하나님을 보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요일 4: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상징을 통해서 요한은 하나님이 불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석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무지개는 노아의 홍수 때에 나타난 것으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보좌에 24장로가 둘러 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24장로는 누구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주장들이 있습니다. 12지파와 12사도의 합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 천사라고 해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학자 혹은 목사님들은 계 21:12-14절의 말씀을 근거로 12지파와 12사도의 합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의 해석일 뿐이지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그 보좌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6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라고 말씀합니다. 19: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는 말씀처럼 번개와 뇌성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나타냅니다. 어느 누구도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거룩하심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심판이 시작될 때를 나타낼 때도 동일한 말씀으로 기록됩니다.
저는 나이아가라 폭포에 가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녀온 분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폭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면 모든 사람들이 장엄하다라며 탄식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변개와 뇌성처럼 그의 위엄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묘사합니다. 우리는 단어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생각하는 바다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솔로몬 성전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는 바다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 손을 손을 씻던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성결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 안에서 우리가 성결케 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좌에 네 생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어떤 학자들은 4복음서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마태를 사람, 마가를 사자, 누가를 송아지, 요한을 송아지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보다는 이 네 생물이 모든 피조물의 대표로 선별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좀 더 본문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자는 맹수 중에 가장 강한 짐승이고 독수리는 날짐승 가운데 가장 위압적이며 소는 가축 중에서 가장 소중하게 사용되는 짐승이고 사람은 그 모든 것 가운데 가장 탁월한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 피조물들이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피조 세계에 충만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24장로와 그리고 보좌에 있는 네 생물에 대해서 언급할 때 24장로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글을 기록한 요한의 입장에서 그들이 누구인지가 중요했다면 그들이 누구인지 기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들이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네 생물이 하고 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요한은 24장로와 그리고 네 생물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리고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하나님. 전에도 계셨고 이제 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는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함과 신실함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가면 하루종일 찬양과 예배만한다고 하는데 주일하루 예배하기도 버거운데 그걸 어찌 감당할지 걱정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재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설교시간이 짧아지고 기도시간이 짧아지고 찬양시간이 짧아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길게 예배드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설교를 길게 하고 찬양을 길게 하고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케 하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가히 좋은 자세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볼 때 혹은 재미있는 운동을 할 때 그리고 재미있는 게임을 할 때는 시간이 짧은 것을 굉장히 아쉬워합니다. 하지만 예배드리는 것을 길게 여기며 지루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11절의 말씀을 읽으면 이러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더욱더 확연해집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감동과 도전을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10, 11절에서 24장로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면류관을 도로 하나님께 드리며 오직 하나님만 영광과 존귀를 받기 합당하신 분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찬양하며 또한 그 앞에 나아가는 것도 모자라 24장로는 자신들에게 허락된 면류관을 벗어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입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면류관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여러 곳에서 이러한 면류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귀한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겪었던 아픔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신실한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면류관을 씌워주시고 위로해주시고 존귀하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헨리 모리슨 선교사는 40년 동안의 아프리카 선교를 마치고 고향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습니다. 그가 탄 배에는 때마침 루즈벨트 대통령이 타고 있었습니다. 배가 뉴욕 항구에 도착하자, 커다란 팡파르 소리와 함께 대통령을 마중 나온 환영 인파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면 레드 카펫을 밟고 항구를 빠져나갔습니다. 대통령이 사라지자 팡파르 소리도 그쳤습니다. 레드 카펫도 치워졌습니다. 군중도 흩어졌습니다. 그때 헨리 모리슨 선교사는 그 항구를 혼자 쓸쓸히 빠져나오면서 눈물을 훔쳤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저의 40년간의 헌신의 결과란 말입니까?” 바로 그 순간, 그의 마음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아들아! 너는 아직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네가 고향에 돌아오는 날, 팡파르가 아닌 천군 천사의 나팔 소리로, 레드 카펫이 아닌 황금 길을 깔아놓고, 내가 친히 마중하마!”
그렇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한 상급과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상급을 받을만한 자격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믿을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수록 이러한 마음은 더욱더 커집니다. 자격이 있어서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면류관이나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구원하신 은혜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구원하신 것도 감사한데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들 가운데 성공을 맛보는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상급을 받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진 사람이 되어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혼자 일하실 때 더 일을 잘하실까요, 아니면 나와 함께 일하실 때 더 일을 잘하실까요?” 이 질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일하실 때 더 일을 잘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십니다. 하나님은 조금 더디고 느려도 우리와 함께 그분의 나라를 세워가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의 능력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지혜를 주셔서 그 일을 감당케 하시고 때론 넘어질 때는 일으켜 주시어 마침내 목적하신 것을 완성케 하십니다. 그렇다면 상급은 누가 받아야만합니까?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 24장로들이 하나님께 자신의 면류관을 드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기쁨에 겨워 감격 속에서 하나님 앞에 노래하는 24장로들이 보이십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드릴 것을 찾다가 자신에게 씌워진 면류관을 드리며 즐거움가운데 예배하는 장로들이 보이십니까?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뵈었을 때 그 앞에서 힘껏 뛰며 춤을 추려면 면류관마저 거추장스러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24장로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차 되어 질 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계십니까?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하십니까? 장차 되어질 일은 하나님의 심판대가 놓여지게 될 것이고 그리고 심판대를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장차 되어질 일입니다. 혹 이 말씀을 듣고 실망한 분들 계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전부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구원 받은 우리에게 그리고 구원하신 하나님 앞에 이것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전  31  32  33  34  35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