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목사] 요한계시록강해-4 / 칭찬받는 성도로 사는 방법

▷ 본문 :요한계시록 2:1-3:22
▷ 설교자 :전근일 담임목사
▷ 설교일 :2012년 12월 9일 주일
2:1-3:22 / 칭찬받는 성도로 사는 방법

요한계시록 2장부터 3장까지의 말씀의 키워드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칭찬과 책망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교회에서 칭찬을 받은 교회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입니다. 그리고 책망을 받은 교회는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 사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고전 4: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가옵니다. 교회로서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설 때가옵니다. 그 때에 칭찬 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후 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주목해서 보면 요한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편지를 보낸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칭찬을 받고 어떤 교회는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옵니까? 세상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니고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냈고 그 내용이 바로 칭찬과 책망이었다는 사실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안믿고를 따라 칭찬과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칭찬과 책망을 들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칭찬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반대로 책망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책망을 받는 교회가 아닌 칭찬받는 교회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에 구체적인 해답을 갖기 위해서는 책망을 받은 교회들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자칫 이 구절을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다 확실한 해석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사랑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셨는지를 보면 더욱더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22:37-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눌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이것은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요하일서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단과의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교회 안에 비진리의 모습으로 침투하는 여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 에베소 교회는 정말 최선을 다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에베소 교회의 열심을 칭찬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이 가열되면서 급기야 성도들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 이단을 배척하기 위한 열심이 성도들을 분열시켰고 파당을 짓게 만들었고 이것이 교회에 큰 위기로 다가오게 된 것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분열하는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꾀 규모가 있는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담임목사님이 자주 바뀐다는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님이 부임해서 잘 버티면 1년 그렇지 못하면 6개월 3개월 만에 담임목사님이 바뀌는 심각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서 어떤 목사님도 그 교회로 부임하려 하지 않는 상황에 신참 목사님이 그 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인도하는데 찬양시간에 정확히 강대상을 기준으로 오른 쪽에 앉은 분들은 손뼉을 치면서 찬양을 하고 왼쪽에 앉은 분들은 손뼉을 치지 않고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자 이쪽저쪽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교회의 전통은 손뼉을 치지 않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교회의 전통은 손뼉을 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 부임한 담임목사가 어리둥절해서 예배가 끝나고 교회에 가장 오래된 장로님에게 물었습니다. “장로님, 과연 이 교회의 전통은 손뼉치며 찬양하는 겁니까? 아니면 손뼉치지 않고 찬양하는 겁니까?” 그러자 장로님이 대답하기를 우리 교회의 전통은 이렇게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열심히 믿고 그 믿음을 따라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 구원받은 성도를 사랑하지 않을 권리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의 아픔을,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며 서로를 섬기는 모습이 교회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고 오히려 칭찬 받는 교회로 우뚝 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둘째, 버가모 교회의 잘못은 니골라당의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것입니다. 버가모는 소아시아에서 제일 번성한 곳입니다. 그리고 그곳은 우상숭배가 가장 극심한 곳이었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곳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이 제우스신전의 모든 것이 독일 베를린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그 박물관의 이름이 페르가몬입니다. 올해 총회 때 베를린에 가서 페르가몬 박물관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당시의 유적을 살펴보며 그 웅장함과 정교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얻은 부를, 그리고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 우수성을 동원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허비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 원인이 바로 니골라당의 잘못된 교훈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니골라당은 우상을 숭배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섰던 이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니골라 당은 무율법주의자들이라고 알려집니다. 지금은 은혜시대에 살고 있으니 율법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버가모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잘못된 교훈을 따른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언제나 단호하게 대처하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할 것을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4:23-24 “너희는 스스로 삼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어떤 형상의 우상도 조각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줄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우상숭배에 무섭게 질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교훈은 눈에 극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교묘하게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사망의 길로 이끌어갑니다. 그리고 잘못된 교훈은 우리에게 달콤하게 그리고 즉각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도록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쉽게 잘못된 교훈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안고 있는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2:12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이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라는 말씀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서 있으면 잘못된 교훈에 빠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면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생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지 못하고 많이 알지 못하면 잘못된 교훈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교회 버가모에서도 훌륭한 신앙인이 배출되었습니다. 안디바란 사람이었습니다. 안디바는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한 구성원 판노니아 채석장에서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디오클레시안 황제 때에 이곳에서 일하는 기독교인 석공들에게 아스클레피온 신상을 조각해 달라는 로마 정부의 부탁을 거절해 안디바를 불에 달군 놋가마 속에 넣고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셋째,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이라는 용납한 것과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책망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에서 출토된 비문에 의하면, 여기에는 여러 가지 동업 조합이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는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는 것이 관례였고 그렇지 않으면 조합원의 권리와 이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또 비문에 의하면, 남신과 여신을 우상으로 섬기는 악한 풍속이 있었는데, 특별히 그 신당 중의 하나에는 신탁을 받은 소위 여선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교도의 신탁의 현장은 종교의 옷을 입은 매춘의 현장이었음 많은 역사가들이 증언합니다. 그런데 두아디라 교회는 이러한 당시의 풍습을 받아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더 심각한 것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결국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죄악에 노출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도 동일한 문제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완전한 구원의 은총 가운데 사는 인간이지만 세상을 살면서 죄의 문제와 별개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로 인해 실제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도 죄를 지을 수 있는지, 혹은 그 죄로 인해서 구원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많이 있습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예수 믿는 사람도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죄의 문제로 구원이 취소되지는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잘못 이해하면 심각한 방종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2:21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이 빛이 임하면 우리는 선을 행하는 데 전적으로 무력한 자임을 보게 되며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의를 이루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무능력한 우리에게 한 가지 은혜를 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회개는 회심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복이라는 의미입니다.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과정에서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건, 이것이 회심인데 이러한 회심의 사건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반면 우리가 믿음과 결단으로 회심을 경험했지만 죄를 짓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는 우리의 죄를 자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사데 교회는 명목상 교회라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데 교회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이단의 위협이나 외부의 핍박이 가장 작은 교회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교적 문화나 주변 환경과 타합함으로 생명력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을 나타내지 못하는 교회가 바로 사데 교회였습니다. 예수님은 6: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교회는 선한 영향력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 생명력을 잃어버린 교회임을 책망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명력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기에 3:2 “너는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기회가 있는 교회입니다. 비록 지금은 죽은 것처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교회처럼 보이지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갖고 있는 교회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몇 주 전에 노르마파에 아내와 산책을 가서 참으로 신기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틀림없이 죽은 고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크기가 얼마나 큰지 놀라웠습니다. 그런데 더욱더 놀라운 것은 그 옆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생명력이 있으면 그 모양은 비록 미약할 수 있지만 생명이 싹틀 수 있고 마침내 자라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살아있기만 하면 그리고 생명의 역동성을 갖고 있다면 비록 죽었다고 판단된 상황에서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뒤집어엎고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한 신앙을 책망 받았습니다. 라오디게아는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였으며 브루기아 가루마 알려진 안약과 의학교가 있었습니다. 또한 활발한 금융 거래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물질의 풍요를 누리게 되면 어느 순간 신앙이 열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삶이 풍요롭고 그리고 세상에서 많은 것을 누리게 되면 신앙의 열정을 잃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0:25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교회에게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처방을 내리셨는데, 불로 연단한 금이 바로 시련을 통한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모든 것이 풍족했지만 단한가지 물이 부족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히에라볼리로부터 끌어온 온천수와 골로새로부터 수로를 통해 가져온 찬물을 공급받는 과정에서 물이 미지근하게 됨으로 식수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여 마시는 자마다 토하여 버렸습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이 미지근한 물을 토해 버리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미지근한 영적 상태에 머물러 있는 라오디게아 교인들을 거부하고 버리겠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삶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뜨겁게 예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처음  이전  31  32  33  34  35  맨끝